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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

율법주의를 엄히 경계합시다②

김영민 목사2015-03-08
제목: 율법주의를 엄히 경계합시다2015. 3. 8(주일오전)
본문: 3:1-3
 
오늘 우리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영적으로 혼미하고 혼탁한 시대이다. 작년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세월호의 소유주인 유병언의 구원파로 인해 나라가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또 몇 년 전에 우리교회도 한동안 신천지로 어려움을 당했는데 지금도 신천지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들과 가정들과 성도들이 많이 있다. 신천지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인들을 미혹하여 교회를 분열시키고 싸우게 만들고 그러면서 수십 명, 수백 명의 교인들을 신천지로 끌고 가는 경우가 연이어서 일어나고 있고, 요즘에는 천주교인들까지 미혹시키고 있기에 천주교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심지어 신천지에 미혹된 사람들이 학교도 그만두고, 직장도 그만두고, 집을 나가 가출하여 신천지의 광신적인 신도가 되기에 가족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많이 당하고 있다. 또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 이전으로 매물로 나온 교회당 건물이나 교회 건축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경매로 나온 교회 건물을 작년에만 해도 수십 개를 인수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작년에 합신총회에서 신옥주 목사의 은혜로교회를 이단으로 결의를 했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그 교회 신도들이 올해 합신교단의 신례하례회에 난입하여 난장판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세상 종말의 때인 것을 기억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단들로 인하여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큰 고통을 당했다. 빌립보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 잘못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악한 영향은 너무나 강하고 파괴적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할례도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그런 율법주의자들을 가리켜서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삼가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傷害)하는 일을 삼가라
우리는 지난 주에 개들을 삼가라”,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는 말씀을 살펴보았다. 지난주일 말씀을 잠깐 정리해 보겠다.
 
1. 개들을 삼가라고 경고한다.
 
유대인들은 개를 매우 불결하고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면서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경멸했고, 가장 천하게 여겼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상종할 수 없는 불결하고 더러운 자들이란 의미에서 개들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다른 거짓된 가르침을 섞어서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유대인들을 오히려 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적인 진리를 왜곡시키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와 성도들을 더럽히는 영적으로 불결한 개와 같은 자들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런 개들, 즉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왜곡시키고 대적하는 악한 자들을 삼가라고 엄히 경계했던 것이다.
 
오늘 날에도 이런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팎에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훼방한다. 옛날 유대인들처럼,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 진리보다 자신의 경험을 더 신뢰하며 사람의 유전이나 전통을 더 중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나 종교적인 헌신이나 노력을 더 내세운다. 우리는 항상 이런 자들을 주의하여 삼가야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런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의()”와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잘못된 율법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한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선행을 더 의지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율법에 따른 자기 행위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행악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은 사명감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안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잘못된 사명감과 열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고 하나님의 일을 망치게 만든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내 마음에 있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내 유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와 영혼들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3.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경고한다.
 
*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傷害)하는 일을 삼가라
여기서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할례를 가리킨다. 원래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인 표시였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남자에게만 시행한 의식이었는데 오늘날의 포경수술과 유사한 것이었다. 남자의 생식기 귀두(龜頭) 부위를 덮고 있는 포피(包皮)를 베는 의식이었다.
* 17:9-14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言約)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表徵)이니라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유대인들은 할례가 자기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명령한 언약의 표시였기에 할례 의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면서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들은 할례의 본래의 의미를 망각해 버리고 단순히 육체의 살을 베는 할례 의식 그 자체를 중요시하면서 강조했고 거기에 집착했다. 할례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가 예수 믿은 후 받는 세례의 영적 의미와 유사하다. “나 자신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나의 죄악된 육체의 욕심은 죽어지고 영적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나 자신의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할례의 중요한 영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할례의 본래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그 뜻대로 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할례 의식을 행하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들을 의롭게 만들며,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인 것을 보증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육체의 할례는 받았지만 정말 중요한 본래의 할례인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요구하시는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영적인 할례이다. 할례 의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 우리 마음과 우리 입술과 우리 삶이 변화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 10:15-16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2:11 “또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이 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아 육의 옛사람은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육체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후에는 구약의 성전이 필요없게 된 것처럼, 또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린 후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필요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의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로서 마음의 죄악을 제거하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안에는 이런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며 성도들을 분쟁케 하는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향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는 무익한 것이기에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터를 허물고 파괴하는 사악한 자들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런 자들을 경멸하는 의미에서 몸을 상해(傷害)하는 자들”, “양피를 잘라내는 자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몸을 상해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물론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몸을 상해하는 자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 없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잘못된 일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어떤 종교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며 정신이다.
*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며 옷을 찢고 회개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진실된 마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크신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는 금식하고 울며 옷을 찢었지만 마음 중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고, 여전히 죄를 저지르고 있었기에 그들이 금식하고 울며 옷을 찢는 행위는 오히려 가증한 행위였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외적으로는 열심히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바쳤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행했기에 주님께 칭찬을 듣기보다 오히려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혹독한 정죄를 당했다.
 
우리의 모든 외적인 종교적인 행위들인 예배, 기도, 금식, 봉사, 헌신, 헌금, 전도, 선교, 구제 등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아름다운 신앙 행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이나 형식보다도 그렇게 하는 우리의 마음과 중심이 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 내용이 바로 되어 있어야 외적인 의식과 형식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용이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의 겉모습과 형식이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증스러운 율법주의 행위가 되고 만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종교 행위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무수히 값진 제물을 바치면서 열심히 제사를 지냈고, 안식일과 절기를 철저히 지켰지만 그 모든 것이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위는 열심히 했지만 생활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가증한 삶,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준엄하게 책망하셨다.
* 1:11-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聖會)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憊, 심히 괴롭고 피곤)하였느니라
결국 이런 율법주의적인 삶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하여 망할 수밖에 없었다.
 
김미진 간사의 왕의 재정이라는 책에 보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미진 간사의 어머니는 진실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197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거지가 많았다. 김미진 간사의 어머니는 권사님이셨는데 매일 거지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 권사님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김미진 간사는 막네딸이었다. 김미진 간사가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밥상에 둘러 앉아 있는 거지들과 꽁보리밥에 열무김치뿐이었다. 물에 밥을 말아서 급히 먹고 나가서 놀다가 해가 져서 집에 돌아오면 영락없이 낮에 봤던 그 거지가 자기 방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권사님은 옆 동네 고아원의 아이들을 서너 명씩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먹이고, 입히고, 살이 조금 오르면 다시 고아원에 데려다주고 또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렇게 집에는 늘 거지들과 고아들이 있었다. 세 딸들은 마음 깊이 어머니를 존경했지만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는 길을 모색했고, 그것은 빨리 결혼하는 일이었다. 딸들이 결혼할 때마다 권사님이 축복을 해주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축복을 딸들에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우리 딸들이 거부(巨富), 거룩한 부자인 성부(聖富)가 되기를 원합니다. 딸들이 재물로써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이들을 사용하시옵소서. 딸들이 시집가서 머무는 곳의 반경(半徑) 1킬로미터 안에 고아와 과부와 객들이 굶는다면 이 모든 죄가 딸들의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딸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느껴졌다. 딸들이 아멘을 하지 않자 권사님은 그런 딸들을 더 축복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딸들이 머무는 곳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고아와 과부와 객들이 굶는다면 이 모든 죄가 딸들의 머리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래도 딸들이 아멘을 하지 않자 계속 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딸들이 머무는 곳 반경 20킬로미터, 30킬로미터, 100킬로미터그렇게 계속 늘려가자 딸들은 어머니의 기도를 잠시 멈추게 하고 회의를 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이 땅에서 발 붙이고 살 수가 없겠다. 그냥 1킬로미터를 아멘으로 받자. 거지없는 부자 동네로 시집가면 되겠지.” 그렇게 의논한 후 딸들이 1킬로미터 축복을 아멘으로 받자 권사님의 기도가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김미진 간사님의 어머니는 참 단순한 분이셨다. 그분은 예수를 믿고 인생을 살 때도 정말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고 단순하게 인생을 사셨다. 그분은 성경을 100독도 더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김미진 간사가 어머니에게 성경에 무슨 말이 있나요?”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성경에 별말 없다. 오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얼마나 정곡(正鵠)을 찌르면서 성경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다.
*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이니라”(All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se two commandments.)
왜 우리가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왜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대상이 우리 이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이웃들도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다 이루기에 또다른 계명이 필요가 없다. 김미진 간사의 어머니 권사님는 정말 성경의 핵심을 알고 정곡을 찌르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 별말 없다. 오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물을 사용하실 때 기준이 딱 두 가지였다. “내가 이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는가?” 그 권사님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늘 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을 드리고 수고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한다면 이런 종교적인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 헛된 것이고 공허한 것이고 아무 쓸모도 없는 가증한 종교적인 행위,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몹시 싫어하시고 심히 괴로워하시고 피곤해 하시면서 견디기 힘들어 하신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바울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자들을 삼가라, 율법주의자들을 삼가라고 엄히 경고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종교적인 가증한 율법적인 행위들이 우리에게 없는가를 늘 성찰하면서 그런 모습이 보일 때마다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참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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